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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관광및문화재

읍면자료실 관광및문화재

읍면자료실(관광및문화제)

국가 지정문화재
국가 지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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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지정번호 지정년월일 문화재명 소재지
보물 547 1971년 07월 07일 예산 김정희 종가 유물 신암면 용궁리
천연기념물 106 1962년 12월 03일 예산의 백송 신암면 용궁리
도지정 지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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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지정번호 지정년월일 문화재명 소재지
유형문화재 43 1976년 01월 08일 김정희선생고택 신암면 용궁리
44 1976년 01월 08일 김정희선생유물 신암면 용궁리
45 1976년 01월 08일 화순옹주홍문 신암면 용궁리
기념물 24 1980년 10월 23일 김정희선생유적 신암면 용궁리
151 1998년 12월 29일 김정희선생필적암각문 신암면 용궁리
문화재자료 188 1984년 05월 07일 김정희의 묘 신암면 용궁리
189 1984년 05월 07일 월성위묘 신암면 용궁리
추사 김정희고택
관광지 및 문화재 추사김정희 고택

신암면 용궁리에 위치하는 추사 고택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 서예가였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유적지인 고택으로서, 선생의 묘, 화순옹주묘(和順翁主墓)와 정려문,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예산의 백송, 추사가 드나들던 화암사가 인근에 있다. 고택은 1700년대에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月成尉) 김한신(金漢藎)이 건립한 것으로 18세기 중엽의 건축물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후손이 오랫동안 거주해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1월 9일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하였다. 그후 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유적지 정화사업을 1976년 9월 4일에 착공하여 1977년 6월 27일 준공을 보았으며, 1977년 9월 22일 충청남도 추사고택 관리사무소를 설치(충청남도 조례 제108호)하여 운영 관리하다가 1980년 1월 1일 예산군 추사고택 관리사무소로 설치변경하여 관리하고 있다.

80.5평으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가 있다. 안채는 6간 대청과 2간통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너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의 집이다. 안방과 건넌방의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천정은 다락으로 되어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그리 흔하지 않은 규모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대갓집 형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옥관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사랑채는 바깥 소슬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잡은 ㄱ자형이다. 남쪽에 한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마루 공간이 큰 것은 주인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데 긴요하게 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랑채 댓돌 앞에 석년(石年)이라 각자(刻字)된 석주(石柱)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공이 제작하였다 한다.

용산(龍山)

지세의 대부분이 낮은 구릉인 신암지방에 유일하게 용산(龍山)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 양끝이 봉우리를 이루는데 북쪽이 앵무봉이고, 남쪽이 오석산(烏石山)이다. 앵무봉(60m)아래에는 추사의 생가와 그분의 묘소와, 증조모인 화순옹주 내외의 묘가 있고, 고조부의 묘 앞에는 백송이 있다. 오석산(94m) 중턱에는 화암사가 있는데, 창건은 백제 때였지만, 현존하는 건물은 추사의 증조부가 재건하고 그후 중수한 것이니, 추사댁의 집안절 이었다. 이 산 아래서 태어난 추사는, 8세 때 서울 장동(壯洞)의 능소꽃 붉게 피던 월성궁(月城宮)으로 올라가던 때까지, 자주 이 절에 놀러 다녔으며, 그곳 스님들과 친히 지냈다 한다.

추사는 그 유년기에 고향의 산에서 받은 인상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노후 때까지 간직한 것이리라. 그렇기에 오산노초(烏山老樵)라 하였고, 자기의 서재를 오산독서루(烏山讀書樓)라 하였다. 추사는 오석산의 남쪽 기슭, 그런대로 멋진 자연암벽에 각자(刻字) 소봉래(小蓬萊)를 남겼는데, 그는 유년시절 고향의 이 하찮은 암벽을 천하절경 봉래산으로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화암사(華岩寺)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용산의 동북향 사면 중단부에 위치하며, 원래의 절은 건립연대를 알 수 없으나, 전해지는 말로는 삼국시대 때 지었다고 한다. 절에는 요사채, 대웅전, 석탑, 범종 등이 있으며, 요사채는 김한신이 지은 것이다. 절 뒤에 병풍바위가 있는데, 옛절은 이 병풍바위 아래에 있었다고 하며, 오랜 세월에 절이 없어지고, 그 뜰에 조그만 탑이 남아 있었는데, 근래 현 위치로 옮겨졌다.

영조 임신년(A.D. 1752)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이 절을 중건하였다. 화암사(華巖寺라는 절 이름은 영조가 명명한 것이고, 이 현판은 월성위가 쓴 것이다. 월성위는 화순옹주(和順翁主)의 부군이고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이니,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가 된다. 월성위가 이 절을 중건한 95년후 헌종 병오년에 절이 또다시 훼손되어, 승려들이 기거할 수 없게 되자, 김추사 일족이 출자하여 다시 중건하였다. 그 건물이 현재의 신암 화암사이다.

부처님 모시는 방을 무량수각 (无(無)量壽閣)이라 하고, 조망루(眺望樓)를 시경루(詩境樓)라 하였다. 이 두 편액(扁額)은 모두 김추사가 쓴 것이다. 절뒤 암벽에도 김추사의 서각인 시경 (詩境)과 천축고선생댁 (天竺古先生宅)이 있고, 오석산(烏石山)의 남단 기암에도 역시 김추사의 서각인 소봉래(小蓬萊)가 있다. 이 절에는 옛부터 5∼6세 소아 크기의 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있었는데, 60여년전 도난당하고 현재의 부처님은 예산읍 향천사의 천불 중에서 이안(移安)한 것이다. 화암사 주변에는 10여기의 지석묘가 있고, 청동기류가 출토되고 있다.

김정희(金正喜) 묘
관광지 및 문화재 김정희(金正喜) 묘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에서 서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을 2단으로 정지한 후 안치되어 있는데, 묘의 주변은 잔디가 깔려 있고, 깨끗이 보호되고 있다.

묘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묘의 바로 오른쪽 앞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장방형의 화강 석재 대좌 위에 오석으로 된 상석의 비신이 올려져 있고, 오석 위에는 옥개형 이수를 올렸다. 비신의 전면에는 완당선생 경주 김공 휘 정희 묘(玩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라고 각서되어 있으며, 나머지 3면에는 비문이 적혀 있다. 묘의 좌우로는 석주가 각각 1기씩 세워져 있으며, 묘역의 주변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놓았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駙馬)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伯父) 김노영(金魯永)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가로서 벼슬이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北靑)에서 10여년간의 유배생활을 지내고 말년에 생부 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철종 7년)에 작고하였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노쇠한 조선왕조의 구문화 체제를 탈피하여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케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北學派)의 거벽(巨擘)으로 청조(淸朝)의 고증학풍(考證學風)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經學)·불교학(佛敎學)·금석학(金石學)·문자학(文字學)·사학(史學)·지리학(地理學)·천문학(天文學)에 이르렀으며 북한산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금석과면록(金石過眠錄)》,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당척독담연제집(阮堂尺牘潭糧齋集)》 등이 있다. 이와같이 광범위하고 철저한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추사의 예술은 시(詩)·서(書)·화(畵)·전각(篆刻) 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도는 추사체(秋史體)라는 독자일문(獨者一門)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루었고, 작품으로는 묵란도(墨蘭圖)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 등이 있다.

김흥경(金興慶) 묘

김흥경 묘는 신암면 용궁리 추사 고택에서 북서쪽으로 도로를 따라 약 500m 정도 들어간 곳의 남쪽 도로변에 위치하는데, 김흥경은 추사의 고조부로 묘는 동향하여 비교적 잘 정지되어 보호되고 있다. 묘의 전방에는 상석과 2개의 석주, 2개의 석잉상이 세워져 있다. 묘의 2m 전방에는 화강석재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방형의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옥개석의 이수를 올리고 있다.

화순옹주 묘(花順翁主墓)

화순옹주 묘는 추사의 증조부이며 옹주의 부군(夫君)이신 월성위 김한신 묘에 부좌 합장(??左合葬)되었다. 앞에 정려문이 있는데, 이것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영조의 2녀)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명정(命旌)한 열려문(烈女門)이다.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 김한신(1720∼1758)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자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여 부왕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군을 따르고 말았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정문(烈女旌門)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명정하였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이존창 유적비

신암면 신종리에 있는 이존창의 유적비가 있는 곳은 내포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루이공사의 생가터이다. 그는 1759년(영조35년) 이 곳 부농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으로 장성하면서 면학에 대한 소망이 간절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 대학자인 권일신 사베리오를 명려동 김범우 토마의 집에서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스승으로 부터 천주교를 접하여, 결국 1785년 경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충청도의 전교책임을 지고 이 곳 고향으로 내려와 자기 가족과 친지들을 천주교로 이끌어 얼마 안가 300여명의 신자 공동체를 이룩했다. 그는 전교에 더욱 힘써 예산, 아산, 면천, 당진, 해미, 덕산, 홍성, 서산 등 내포 여러 고을의 농민, 빈민 등 서민 층에 복음을 퍼뜨려 내포지방은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가 되었다.

신해년 진사사건이 일어나자 이존창도 체포되어 공주로 이송되어 충청 감영에서 철저하게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어 잠시 마음이 흔들려 신앙 일선에서 물러 날 것을 약속하고 석방되었다. 그 약속은 그에게 큰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 홍산, 금산 등으로 이사 다니면서 몰래 전도에 몰두하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자 이존창은 서울로 올라가 신부를 찾아 뵙고 충직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주신부를 고산까지 모시고 와 성무도 도왔다. 1795년에 다시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연행되어 취조 받은 후 천안으로 이송되어 6년동안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다시 박해가 일어나 1801년 3월22일 공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되어 국청에서 거듭 취조와 갖은 고문을 받았다. 결국 사형이 언도되어 참수 처형되어 4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휘광이의 여섯 번째 칼에 목이 끊기였는데 수 일후 친지와 교우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어 들일 때에는 목과 몸이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다만 희끄므레한 실날같은 흉터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신부와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도 그의 혈맥을 이은 분들이다. 그의 묘는 확인 할 수는 없으나 경주 이씨 문중의 여사을 산에 20여기의 무덤이 있는데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은 그 무덤 중의 하나가 그의 묘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우리 후손들은 가신 분의 얼을 본받아 민족구원의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순교의 삶을 다짐하면서 여기에 그 분의 업적을 새긴 것이다.

백송(白松)

백송(白松)은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는 몇 그루밖에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이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때에 청나라 연경(燕京)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홍경(金興慶)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갈린 수형이었는데 제일 큰 가지는 고사하였다. 수령은 약 200년이며 높이는 100m로서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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